
모네가 복권에 당첨되여 경제적인 독립을 하며 여유를 얻은 뒤, 그는 말년에 작은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며 정원을 꾸몄는데, 이는 당시 유행해던 일본풍 정원이였다. 그는 이 정원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는지 그가 더 이상 붓을 못들때까지 정원의 수련을 약 250여점 그렸는데, 그는 정원의 색채의 범람에 취하며 더 이상 내게 다른 소재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릴 목적으로 수련을 심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의 수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을때는 그는 그의 수련만을 광기에 휩쓸린듯 그려냈는데, 인상파의 개척자 답게 그의 수많은 수련 그림은 그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표현이나 느낌이 달라지는 인상을 준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의 묘사는 물론이고, 수련의 성장과 정원의 형태가 조금씩 ..

모네가 인상주의의 개척자가 되며 일생 인상주의를 고집하게 된것에는 그의 스승인 월리엄 터너의 영향이 굉장히 큰데 "월리엄 터너 이전에 영국에는 안개가 없었다" 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의 빛의 묘사는 탁월했으며 획기적이였다. 그의 작품은 풍경을 빛의 묘사에 따라 빛의 변화나 선명도, 광채량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여러 각도나 형태를 그려냈는데, 이 방식을 전쟁때문에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피신한 모네에게 강렬한 인상과 함께 자신이 옳았음을 확신하며 인상주의의 개척자의 길을 걸어가는게 무지막지한 영향을 주었다. 터너의 '노햄성의 해돋이'는 강렬한 빛 때문에 마치 주변 풍경이 불분명하고 일그러지며 윤곽선이나 정교한 그림자 등 당시에 유행하던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정반대의 것으로 오로지 빛의 느낌, 빛과 풍경의 ..

인상파는 모네가 그와 생각을 함께한 사람들과 만든 예술가협회에서 연 전람회에서 그의 작품을 보며 작품명을 물었을때 그가 즉흥적으로 답한 '인상, 해돋이'에서 유래했기에 클로드 모네는 인상주의의 개척자이며, 대부분의 화가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상주의를 떠나갈때도 그는 일생 인상주의만을 철저하게 고집하는 그야 말로 인상주의적인 화가였다. 인상주의는 풍경과 물체를 단순히 보이는 것과 가깝게 그리는 것에 멈추지 않고 빛과 그림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받은 이 인상을 갖가지 색감과 질감을 표현하며 자신이 느낀 이 "인상"을 최대한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작품들은 인상주의 개척자 답게 간단하지만 단순하지 않고 그의 행동거지 처럼 즉흥적임을 크게 드러나며 순간의 빛과 색을 감정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이..

험난하고 쉽지않던 결혼생활에서도 헌신하며 그를 지탱하던 카미유는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궁암이 걸렸으나, 모네가 치료비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며 이를 알리지 않았다. 뒤늦게 모네가 카미유의 병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되돌릴 수가 없는 단계였다. 모네는 이 시기에 알리스 오슈데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알리스는 몰락한 부호의 아내로 모네와 병든 카미유, 그리고 알리스와 그의 자식들이 한 지붕아래 하나라는 기묘한 관계로 지내게 된다. 이들 사이에 어떠한 교류나 감정이 오갔을지는 몰라도 알리스는 병든 카미유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으며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때에도 가는길을 끝가지 지켜주었다. 카미유가 그의 곁을 떠난 이후, 모네는 알리스와의 묘한 관계를 인정이라도 하듯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카미..

모네의 많은 작품들은 그가 큰 복권에 당첨되어 경제적으로 부유했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고 말해진다. 그가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기에 부모로부터의 독립 이후 많은 명화를 탄생시킨 것은 사실이나 복권이 당첨되기 전인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가난하여 굉장한 고생을 하면서 지내던 시기에도 그의 손길과 마음은 불타고 있었다. 화가와 모델 사이로 만난 모네와 카미유는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돌파했기에 둘의 결혼생활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크게 힘들었다. 허나 힘든생활이더라도 둘은 끈끈했고 서로를 지탱하고 의지하며 모네는 많은 작품에서 카미유를 그려냈으며, 그의 그림들 또한 팔리기 시작하며 경제적으로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도중 카미유는 골반의 종양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